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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말이 안 돼’ : 갑작스레 충격을 받은 친구에게
by Jon Bloom
2020-01-20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돼. 이게 사실일 리가 없어.” 또 한 번의 자살.이 내용을 나에게 문자로 보낸 친구에게는 아주 신앙 좋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모든 면에서 봐도 진실하고 활기가 넘치는 신앙의 소유자였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어둠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절망에 빠져버렸다. 그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친구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비극 앞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우리가 흔히 “악의 문제”라고 부르는 게 있다. 전지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어떻게 이토록 악과 고통이 만연한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용어이다. 그것을 단지 “문제”라고 부르는 것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실제로 겪는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다. 짐을 다시 맡기라어떤 일이라도 이겨낼 것 같던 친구가 갑자기 인생을 끝내버렸다. 사랑하는 자녀가 병으로 죽는다. 고문이 자행된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믿었던 배우자가 나를 버린다. 비행기가 날아와서 건물이 무너져 3천 명의 영혼 위에 쏟아져 내린다. 우리가 겪은 끔찍한 현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아픈 기억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다. 그런 비극과 죄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다. 사탄이 가져온 사악한 파괴를 더 가까이에서 보면 볼수록 세상은 더 혼란스럽다.이런 경험을 겪으면서 우리는 악의 진짜 본질을 엿볼 수 있다. 그 본질은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다. 악한 일들, 그리고 그런 악을 막지 않고 선한 경륜 안에서 악을 허락하는 하나님은 그 자체로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을 초월한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 앞에서 절망하고 또 혼란스러워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는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왜 이런 비극과 그에 따른 절망적인 파괴를 허락하는지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비극 속에 숨겨놓은 특별한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발견한 것은 이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인간이 선과 악 속에 있는 지식 전체를 감당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지식이다. 선과 악의 두 측면은 우리의 이해 수준을 초월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은혜로운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단지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맡기라고 말한다. 자비로운 신비자비로움의 신비가 있다. 실로 위대한 자비로움이다.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이 신비로 남아야 한다고 명령한 바로 그 비밀을 품고 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분명하게 경고했다. 만약에 그들이 먹는다면 그 결과는 죽음이라고 했다. 선과 악의 신비를 아는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했다(창 2:17).그러나 사탄은 이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이 가진 높이와 깊이, 그리고 넓은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창 3:4-5). 인간은 사탄의 말을 믿었고 열매를 먹었다. 그러자 정말로 그들의 눈이 열렸고, 선과 악을 보게 되었다. 우리 인간은 그날 이후 이 지식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그 첫 번째 결과가 죄였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허무한 데에 내어주었다(롬 8:20). 그리고 사탄은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았다(요1 5:19). 죄는 우리를 심각하게 오염시켰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는 지식을 향한 눈이 열린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속임수에 취약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우리 안에 내재한 죄성은 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능력을 왜곡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엡 3:18-19) 능력이 필요하다. 괴로울수록 기도를 통해 더 열심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하고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엡 1:17-18)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설령 우리가 죄성이 없는 존재라고 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런데 하물며 죄에 빠져있는 지금 우리의 상태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고전 2:9). 하나님처럼 지혜로울 수 있다고 믿은 우리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하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욥의 고통 속에 있는 신비신비는 우리의 인식(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나 이해력(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의 범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현실 차원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어떤 신비는 하나님이 그것에 대하여 알게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신비로 남는다. 또 어떤 신비는 인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현재 이 세상의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기 때문에 신비이기도 하다. 욥기는 고통의 신비 앞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우리가 신비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 또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욥의 비극 뒤에 숨은 것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비 그 자체였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욥의 고통을 진단할 정도로 선과 악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욥 42:7).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은 고통의 이유를 욥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긴 욥을 깨닫게 하셨다. 그러자 욥은 그의 손을 자기 입에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3:3,6). 욥은 성공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시 맡겼다. 욥기의 메시지는 고통과 비극 속에서 혼란을 토로하는 인간을 하나님이 미워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머물렀을 때 그도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성경 전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나를 믿어라”이다. 우리가 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이유는 하나님이 거기에 선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계획하셨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까지도 애초에 하나님의 소유였다. 결코 인간의 소유일 수 없는 것이기에 다 하나님께 다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그 분을 믿는 것선과 악의 실재가 우리의 제한된 감각을 뛰어넘고, 이해력을 압도할 때, 우리의 한계를 눌러버릴 정도로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기묘하게 만들어진 존재이다(시 139:14).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끔찍할 정도로 제한된 존재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놀라운 평안(빌 4:7)은 너무도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런 평안은 우리가 주님을 이해하는 이해력에 의지하지 않고(잠 3:5) 온 맘으로 믿기만 하면 주어진다. 친구의 비극적인 자살 때문에 고통받고 슬퍼하는 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을 때, 나는 이런 진리를 몇 줄 안에 어떻게 담을지를 고민했다. 그는 내게 좀 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 요청이 바로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 끔찍한 비극을 앞에 놓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선과 악의 지식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선하신 진리는 우리에게 그 지식을 감당하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 자신에게 모든 짐을 맡기라고 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It Doesn’t Make Sense’: When We’re Blindsided by Suicid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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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소명
충격
친구
죄
욥의고통
자비
선과악
신비
평안
악마들이 크리스마스 때마다 하는 일
by Greg Morse
2019-12-23
이 글의 형식은 C. S. 루이스의 고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를 반영한다. 원래 삼촌 악마인 스크루테이프로부터 편지를 받던 웜우드(Wormwood)가 여기서는 자신의 조카 글로브드롭(Globdrop)에게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에 관해 조언한다.사랑하는 글로브드롭에게,저번에 네가 아주 노골적으로 반응한 대로, 최근에 보낸 편지가 너를 꽤나 메스껍게 만들었나 보구나.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네 등골을 오싹하게 하고 토하고 싶은 기분까지 들게 했다니. 그런데 아마도 나한테 그런 말을 쏟는 게 편하다고 느낀 모양인데, 잊지 마라 조카야, 넌 지금 삼촌이 아니라 상관에게 보고하는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이 사실을 너에게 상기시키기도 싫구나.뭐 네가 경솔하게 말하긴 했어도, 도저히 못 믿겠다는 네 심정도 이해는 간다. 어떻게 내가 그 원수(예수 그리스도)와 싸워야 하는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정말 너한테 ‘메리’ 크리스마스를 보내라며 편지를 맺을 수 있었겠냐. 오히려 우리는 저 옛날, 바로 그날에 일어난 일만 생각하면 몸서리를 치는 자들이 아니냐. 다른 수많은 악마들도 그날에 대한 기억을 마치 전염병처럼 피하려 하더구나.원수가 이 땅으로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극한 혐오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고 있었지만, 우리는 무슨 일이 시작되었는지 바로 알아차렸지. 선전 포고도 없이 전쟁이 시작된 거야. 당시 나는 신참내기 악마였는데, 그때 내가 간절히 바라던 일은 하나밖에 없었단다. 우리의 대장(사탄) 뒤에서 격분하던 스크루테이프 휘하에 들어가는 일이었지. 그런데 바로 그 아기를 수색하며 모든 남자 아이를 다 집어삼키던 우리의 전략에 한 가지 결점이 드러나고 말았어. 당시 본부에서는 우리의 습격이 성공했다고 추측했지만, 그 아기는 애굽으로 탈출하고 말았던 거야. 그 기억의 트라우마가 가시지를 않는구나.하지만 우리가 저 음울한 날에 적군에게 패배했다고 단정 짓지는 마라. 지금도 약해 빠진 악마들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면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그지만, 제대로 된 군사들은 목숨을 걸고 적군으로 뛰어들어 싸우지. 그 결과 지금까지 많은 땅을 차지해서 원수에게 현혹되지 않은 영혼들을 우리 진영에 편입시켰어.악마들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법물론 원수의 출현만 생각하면, 언제나 오싹해지는 이 기분은 영원히 피할 수 없을 게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 끔찍한 휴일을 기념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이 또한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를 거다. 우리는 저들과 함께 노래하고, 축제를 벌이고, 선물을 주고받고,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영화를 관람하며 시간 때우는 일을 몹시도 좋아하지. 너는 그 휴일에 살그머니 물러나 상처를 어루만지며 전의를 다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우리에게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땅을 상당히 되찾았단다. 그 휴일에 우리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설마 못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1. ‘Xmas’를 기념하게 하라오랜 옛날에 그 아이를 제거하는 데 실패하고 나서 우리가 어떻게 해 왔는지를 네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봐 이야기한다.지금은 멋진 트리와 선물, 각종 장식과 반짝이는 조명, 산타와 눈사람, 달콤한 쿠키와 즐거운 파티, 이런 게 다 크리스마스를 말해 주지 않냐. 이렇게 우리는 그 아기를 건초더미 아래에 숨겨 두었단다. 이제 사람들이 말하는 메리 크리스마스란, 빈방이 없다고 외치던 여관들과 같지. 그들은 자기 양만 치는 목자들이 되었고, 서로 교환할 선물은 가졌어도 베들레헴을 향해 빛나는 저 별은 주목하지 않는 이상한 동방박사들이 되었어. 봐라, 기분 좋게도 크리스마스가 어떻게 축약되었는지. 우리는 그날을 단순히 ‘Xmas’라고 표기한단다(역주: 여기서 ‘X’는 헬라어에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단어의 첫 자음이 아니라 무엇이든 대입할 수 있는 미지수 ‘X’를 의미한다).그처럼 들뜬 날에는 스크루지도 필요 없지. 그저 초콜릿 생각만 저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으면 돼. 아니면 칠면조라든가 화로에 구운 밤이나 호두를 맛보도록 유인해도 좋겠고. 그렇게만 해도 저 2천 년 전의 아기는 사라지게 되니까. 물론 우리가 저들의 마음에서 원수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더 많단다.2. 예수를 아기로만 생각하게 하라요즘도 어떤 사람들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전통을 지키려고 하지. 저 종교 의식에 물든 인간들은 그 아기를 결코 버리진 않을 거야.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예수를 그저 힘없고 귀엽기만 할 뿐, 사실상 위협이 안 되는 아기의 모습으로 저들의 마음에 두면 되니까. 이런 절기에만 생각하거나 찬양하는 또는 장식품에나 등장할 법한 그런 모습으로 두면 된다는 거야.저들이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날의 예수를 한번 봐라. 얼마나 포근하게 마리아의 품에서 쉬고 있냐? 얼마나 순하고, 고분고분하고, 유순한 모습으로 안겨 있는지를 보라고. 원수가 저렇게 불분명한 소리로 옹알거리고, 누구도 심판하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냐? 그러니 결코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가 성장하도록 놔두지 마라. 우리는 여태까지 죄라든가 거룩 또는 그 아버지의 영광 따위는 신경 쓸 수 없는 혀짤배기 젖먹이의 모습으로만 원수를 생각하도록 사력을 다해 왔다. 그 결과 원수를 바라보는 이들이 그 아기를 경외하며 예배하기보다 그저 사랑스럽게 여기며 손으로 한번 쓰다듬고 마는 그런 마음만 갖게 되었지.나의 경우도 말하자면, 저 구유에 있는 메시아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원수의 탄생은 하나같이 크리스마스카드에나 어울리는 장면으로 묘사되지 적군의 작전회의실을 떠올리게 만들지는 않거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임마누엘’을 아무런 명령도 못하고 깊이 잠든,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아기로 대체해 놓았단다. 그런 아기라면 저들의 용사가 될 수 없으니까. 심지어는 사람보다 못한, 한낱 인형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하나님이 아니라 이유식 거버(Gerber)의 아기가 등장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구.3. 매사가 즐거운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게 하라일단 원수를 아기의 모습에 묶어 두었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작업이 있다.너는 이 시즌이면 느껴지는 희망이나 평화 또는 기쁨 따위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냐?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훈훈한 정서를 느껴 본 적이 있냐는 말이다. 이런 분위기는 일종의 크리스마스 망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 가족 모임, 연말 휴가, 선물 교환, 자선 사업까지 더 즐기게 만들어서 정작 왜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옛적부터 노래해 왔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게 해 놨단다.그러니 매사에 들뜨고 즐거운 날을 보내게 만들어라. 그렇게 자기 정서에만 집중하게 하면, 네가 다스리는 백성들은 결코 “큰 기쁨의 소식”을 알지 못하게 될 테니. 그래 센티멘털리즘, 조카야, 감상주의에 빠져들게 하라구. 기분이 업되어 헛된 감상에 젖어들수록 유리하단다. 잠시만 고통을 거두자는 거야. 그렇게 하루만 지나 봐라. 선물은 포장이 뜯긴 채로 놓여 있고, 거실은 텅 비어 있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사라지고 없지. 다시 일터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어. 그러면 12월 26일은 일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허탈한 날이 되지.4. 크리스마스용 신자가 되게 하라조카야, 마지막으로 이 사실을 기억해라.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추진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바로 스물네 시간짜리 기독교를 만드는 프로젝트지. 너도 이 시즌이면 사람들이 어떻게 종교적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지 알지? 그날에는 교회 출석률이 급등해도 개의치 않아도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날 하루만 신자같이 행동하도록 저들을 부추겨야 해. 가끔씩 치과 진료를 받듯, 저들의 종교 생활에도 연간 검진은 필요할 테니.글로브드롭, 이렇게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사람들의 마음에 종교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좋단다. 그러면 저들의 양심은 깊은 잠에 빠져들거든. 일회성 신앙으로 면죄부를 얻는다고 여기니 얼마나 편히 잠들겠냐. 물론 너도 알다시피, 원수는 크리스마스에도 출석 체크를 한다. 그리고 저들이 매년 교회에 들르려고 노력하는 한, 크리스마스이브에 참석하는 비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저들도 정죄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이 크리스마스용 신자들은 교회에서도 그저 쿠키 생각밖에는 안 한단다.즐거운 Xmas를 보내기를아무튼 그날이 원수의 승리를 상기시켜 사람들을 우리 손아귀에서 더 멀리 벗어나게 하려고 만들어졌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거라. 그런데 이 생일 파티에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선물을 주고받고 달콤한 기분에 빠져들며 화목한 모임을 갖고 좋은 음식까지 나누는데, 정작 그 아기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는 상태란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최고의 Xmas를 꿈꾸고 있지.아직 그날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구나. 그러니 저들과 함께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지나간 캐럴이라도 부르면서 흥겨운 정취를 자아내라. 물로 일 년에 한 번이니까 교회에 가도록 좀 부추기고(그래야 출석 체크라도 받을 게 아니냐). 그러고는 저들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들어라. 어쨌든 가난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일만 아니라면, 무슨 일로라도 저들의 스케줄을 다 채워도 좋다. 다만 누구도 그 아기와 직접 대면하게 해서는 곤란하다.아무튼 불결한 메시아를 예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게 요점이다. 물론 우리가 그 아기를 나중에 매달았던 저주스러운 나무 주변에도 모이게 해서는 안 되고. 한자리에 모여 기도한다든가, 성경을 읽는다든가, 아니면 영혼이 죽어 있는 우리 백성들을 꾀어내 시간을 함께 보낸다든가, 그런 일을 못하게 하라는 말이야. 그날은 그저 기분 좋게, 피상적으로, 안전하게 보내는 게 최고다.그러니 다시 말하지만, 즐거운 Xmas를 보내라!벌써부터 들뜬 너의 삼촌,웜우드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Dark Side of Christmas번역: 장성우
영성
신앙과소명
루이스
악마
크리스마스
Xmas
아기예수
스크루테이프의편지
일이 문제일까, 내가 문제일까
by Teena Dare
2019-12-18
“계속해야 할까 떠나야 할까? 내게 맞지 않는 일을 택한 아닐까? 아니면 나란 사람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불평꾼에 지나지 않는 걸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건 당신의 고민이자 또 내 고민이다. 오늘, 다섯 번째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문득 예전에 하던 일이 떠올랐다. 남의 손에 들려 있는 떡이 커 보이는 법이다. 불만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다. 내가 지금 왜 불만인지조차 모를 때도 있다. 불만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불만의 원인이 각양각생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불만이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니기에 그렇기도 하다. 성경을 여는 첫 장면에서 우리는 이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창조주가 주신 불만태초에 하나님은 세상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모든 것을 신중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좋아하셨다. 하나님의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지으셔서 세상을 돌보고 가꾸고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시원한 시간에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니시며, 두 사람이 당신이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운 면면을 찾아내고, 또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보는 걸 보시며 미소 지으셨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데 만족하는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혜와 규칙에 따라 세상을 가꾸어 나가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일그러진 불만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권위를 거역한 결과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다. 서로 보듬어 주지 못하고, 서로를 탓했다. 그들이 누렸던 창조 세계가 조화를 잃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 이제 고생하며 일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인생은 고뇌의 연속이요, 그 끝에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과 내가 느끼는 일그러진 불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는 현실은 이렇게 망가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 구속적 불만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세계가 죽음과 부패에 빠져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창조세계를 죄의 손아귀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우리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하셨다. 당신이 직접 사람이 몸을 가지시고 조롱과 고문을 받으시고 맨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셨다.구속적 불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을 일깨우는 불만이요 우리로 하여금 오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게 하는 불만이다. 우리의 일은 허리춤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고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발을 씻겨 줌으로써 이 구속의 이야기에 들어가는 기회이다. 창조세계를 가꾸어 가는 만족그러면 우리 불만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가꾸어 나가고자 하는 불만인가? 자신의 안위와 현실에 집착하는 불만인가? 망가진 세상에서 좌절하여 생긴 불만인가? 흐트러진 창조세계를 다시 잘 짜 맞추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 불만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다음은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실천 방법들이다. 1. 당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시 서술하라.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네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하라.” “네 열정을 추구하라.” “네 꿈을 좇으라.” 주어진 일이 행복하지 않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행복의 원천이 있다. 부와 명예, 지위, 권력, 또는 우리가 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성취감과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일반적인 관념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온통 ‘우리’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야기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당신을 이 이야기에 맞추라. 성경 말씀에 시간을 쏟아라. 말씀을 읽고 외우고, 말씀대로 기도하고, 말씀을 노래하고, 말씀을 서로 이야기하고, 일상의 세세한 부분들에서 말씀을 적용하라. 일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시시때때로 점검하여 하나님의 계획에 다시 맞추어야 한다. 로마서 12:2에서 바울은 우리를 이렇게 상기시킨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2. 하나님은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이 이야기에 비추어 어떻게 여기실지 생각하라.다음 질문들을 가이드로 활용하라. •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당신의 동료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 당신의 일은 상처와 실패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와 유익을 주는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제공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3. 잘 섬기고, 잘 쉬라.교회나 공동체, 현재의 직업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세워 두신 계획에 맞는 일이 어떤 것인지 찾아 나가라. 예수님이 당신에게 사랑을 넘치게 베풀어 주셨듯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라. 그리고 의도적으로 쉬도록 하라. 우리는 때로 일을 하면서 불만을 품는데, 이는 우리가 일이 우리에게 기쁨과 성공과 정체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상에 빠진 것을 회개하고, 잠시 멈추어 쉬면서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묵상함으로써 그 우상을 물리쳐라. 4. 조언을 구하라.당신을 좋아하고 잘 아는 경건한 사람에게 당신의 재능과 은사, 고민과 두려움에 대한 조언을 구하라. 공동체와 떨어져 있으면 자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가 적다. 가능하면 연장자이고 현명한 상담자와 이야기하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조언을 구하라. 막히고 답답한 삶의 큰 돌파구가 될 것이다. 현재 하는 일을 그냥 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주는 등 적어도 한 번쯤은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행동해 볼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라.5. 적극적으로 기다리라.구직 정보를 계속 찾아보거나 이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잠잠히, 느긋하게 이렇게 하라. 가장 좋은 때 하나님이 다른 일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그동안 당신은 현재 있는 곳에서 마음을 다해―신실한 만족과 불만 둘 다 품고서, 하나님을 섬기면 된다.원제: Is My Job the Problem? Or Am I Just Discont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생활
직업
이직
욕망
창조
고민
기도
인도
구속
사랑
광야에 있다고 느낄 때
by Gavin Ortlund
2019-12-16
성경에서 ‘성공적인 목회 사역’의 모델을 꼽으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엘리야보다 더 역동적인 일을 겪은 사람은 없어 보인다. 엘리야는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하였다. 우상 숭배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들의 신앙을 돌이키도록 했다. 3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가뭄도 끝나게 했다. 멋지지 않은가!우리는 엘리야의 갈멜산 사건을 기억하지만, 그가 갈멜산에 오르기까지 경험했던 것은 곧잘 잊어버리곤 한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그는 광야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광야의 훈련 기간을 보낸 후에 엘리야는 갈멜산에 섰다. 우리는 엘리야와 같이 능력의 사역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사용하여 목회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 사역에는 17장과 같은 준비 기간이 있다. 그 시간은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리며 마실 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현실에 대한 어려움이 끝날 때까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질문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시간의 연속일 것이다. 광야 기간은 잔인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7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광야의 기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홀로 외로이열왕기상 17장 1-6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이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한 것에 대한 심판으로 온 땅에 가뭄이 들게 하신다. 그리고 엘리야를 광야로 보내어 까마귀가 그를 먹이도록 하신다. “내 말이 없으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왕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던 사람이(1절) 광야에 숨어 지내며 까마귀가 가져오는 음식을 먹고 시냇물을 마셔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2-5절). 하늘의 구름을 다스릴 만한 권세가 있던 사람이 시냇물을 마시기 위해 땅에 몸을 구부려야 했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당장 마실 것을 걱정해야 하는 비참한 상태가 된 것이다.시간이 지나면서, 더 힘든 것은 참담한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 2:18)라고 했는데, 엘리야는 오랫동안 홀로 외로이 있었다. 나는 그가 바위 위에 앉아 있거나 동굴 안에 숨어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그는 외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추측해 보건대, 그릿 시냇가에 신문이 배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으로 본다면,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해서 주위에 아무도 없거나 혹은 SNS에 올린 당신의 이야기에 아무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다.외로움을 극복한다고 해도 이 기간은 무척이나 지루했을 것이다.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않고 왕에게 도전할 만큼 강하고 용기 있는 선지자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신의 먹을 것을 위해서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시냇가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날마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대면해야 했다. 여러 날을 보내면서 주변의 나무들과 모래가 어떤 모습인지 기억할 정도였다. 매 끼니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같은 음식(빵과 고기)을 먹었다. 말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이 시련이 끝날 무렵, 그의 모습은 아마도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에서 흰머리, 덤불 같은 수염, 갈라진 피부, 거친 눈매의 톰 행크스와 비슷했을 것 같다. 그리고 시내가 말라버린 어느 날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른 곳으로 보내셨다. 거기에는 광야 경험에 대한 출판 계약도 없고 순회강연의 기회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머물며 또다시 기다리고 숨어지내는 시간을 보내게 했다(왕상 17:7-24). 그의 목회 사역은 사회적으로 약자인 이방인 과부와 그의 아들뿐이다. 과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밀가루 한 줌과 병에 남아 있는 기름 조금이 전부이다. 엘리야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 믿어야 했다.보호, 공급, 준비광야 기간에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며 가장 강력하게 일하고 계신다는 소망이다. 열왕기상 17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엘리야의 삶에서 일하고 계셨다.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며 준비시키셨다.아합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첩자를 보냈기 때문에(왕상 18:10)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고 계셨다. 가뭄 동안 그가 안전하게 있을 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광야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시냇가에 있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어 먹이셨고,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을 계속 공급하심으로 먹이셨다. 까마귀는 매일 왔고, 밀가루와 기름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단조로운 방식이지만 기적 같은 공급이었다.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살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보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준비시키고 계셨다. 엘리야가 18장에서 바알의 모든 거짓 선지자들을 대항하는 믿음과 용기를 어디서 얻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동안, 곤란 중에서 신실하게 돌보심을 경험하면서 그의 믿음은 다이아몬드처럼 확고하고 단호해졌을 것이다.우리가 광야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며 준비시키시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 “내가 이토록 황량한 곳에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기억하라! 그분은 최악의 광야를 겪으셨다. 십자가의 비참한 고통을 겪으셨다. 그것이 죄인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마음이기에 우리도 그분을 믿으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광야에 있더라도 말이다.하나님 중심 사역열왕기상 17장은 우리가 목회를 수행하고 평가할 때, 우리의 관점과 행위 면에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한다. 결국 ‘목회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신실함이라고 정의된다. 그 부르심이 열왕기상 18장에서처럼 능력을 발휘하는 일일 수도 있고, 열왕기상 17장처럼 끝까지 인내해야 하는 광야로의 부르심 일 수도 있다.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원한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마 9:37)라고 긴급함을 느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아신다. 만일 엘리야가 까마귀를 기다리는 것이 열매를 충분히 맺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떠나버렸다면 어땠을까? 그는 갈멜산의 놀라운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생존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별 볼 일 없는 상황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신실하게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기로 부르셨다면, 광야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별 볼 일 없이 느껴지겠지만 매 순간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역의 마지막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사역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맛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실제로 생명의 길이다.하나님께서 광야의 시기로 부르시면 두려워하지 말라. 황량하고 질식할 것 같은 곳에 있다고 느끼는가? 겨우겨우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여겨지는가? 엘리야를 돌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보호하고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까마귀를 찾아보라.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라. 그리고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펼쳐질 것들을 준비시키는 시간으로 사용하고 계심을 인정하라. 만일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없다면, 앞으로 당신에게 주어질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You’re Waiting in the Wilderness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광야
엘리야
외로움
소망
부르심
인내
신실함
신앙인의 이중 국적
by Justin Taylor
2019-11-18
예수님을 윤리적인 모순이나 신학적인 딜레마에 빠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러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요 18:36). 틀림없이 그분의 나라는 장차 다가올 시대에 속해 있었지만, 동시에 현시대 곧 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나라는 가정이나 국가와 같이 현시대를 이루는 인간 사회의 조직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누가복음 20장에서 사두개인들은 과부가 되었다가 재혼한 여성의 경우 부활 시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매우 실험적인 질문을 던지며 가정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느니라]”(눅 20:34-35). 즉 가정은 이 땅에서 지속되는 제도에 속할 뿐, 장차 다가올 나라는 그와는 다른 원리로 운영된다는 말씀이었다.또 유대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옳으냐며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시며 누구의 형상과 글귀가 거기에 새겨져 있는지를 도로 물으셨다. 이에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눅 20:24), 예수님은 이 같은 결론을 내리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눅 20:25). 이처럼 도전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은 가이사가 지닌 권위를 제한하시고 하나님이 지니신 무한한 권위는 그들 앞에 드러내셨다. 곧 데나리온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면, 모든 인간 존재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께 우리 모두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국가 역시 이 땅에서 지속되는 제도에 속할 뿐, 장차 다가올 나라는 그와는 다른 원리로 운영된다는 말씀이었다.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주후 5세기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라는 대작을 저술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을 대조하며 자신의 정치학적 견해를 선보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어거스틴을 오해하며, 그가 물질적인 영역인 지상에서의 생활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도성을 이야기하고 그와 상반되는 의미로 천상에서의 생활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도성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에 모두 속할 수 있는 구성원이 되고 만다. 이와 달리 어거스틴은 하늘과 땅이라는 대립된 비전을 제시하며, 서로 동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두 공동체 또는 두 무리에 관해 이야기한다(참고로 이와 같은 두 도성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역사 가운데 공존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실은, 인간의 도성은 창조가 아니라 타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도성의 욕망과 관심사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심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성령이 아닌 육신의 기준을 따라 표출된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는 구속받은 백성들은 하나님 자신을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며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도성 가운데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도성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패러다임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히 13:14),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게 된다(히 11:10). 이 땅에서 영원한 집을 소유하지 않은 “거류민과 나그네”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벧전 2:11). 그런데 이와 동시에 우리는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기도 하다(렘 29:7). 그렇기에 우리는 결국 ‘이 세상에 속한’(of the world)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일꾼으로서 ‘이 세상 속으로’(into the world) 보냄 받아 ‘이 세상 속에’(in the world)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요 17:15-16; 고전 5:9-10).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을 본받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기를 추구하며(롬 12:2)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도록 우리 자신을 지킨다(약 1:27). 그러면서도 또한 우리를 둘러싼 세상 문화 속에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부패함을 막는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마 5:13-16; 빌 2:15).두 가지 시민권성경에서 현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메타포 중 하나가 시민권이다. 시민권이란 공인된 법적 지위로서 누군가에게 부여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인 도시(또는 국가)에서 활동하는 각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가 포함된다. 따라서 군주제로 세워진 왕국의 백성과는 다르게, 시민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한다.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의 개념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까지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간수가 상관의 명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조용히 풀어 주려고 했을 때, 바울은 이렇게 말하며 분개했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행 16:37). 그리고 사도행전 22장에서는 천부장의 명을 듣고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백부장을 향해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짐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 22:25).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시민권자였다고 밝힌다(행 22:28). 이러한 에피소드에서 로마 당국자들이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인 이유는, 그들이 로마 시민이 가진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였기 때문이다(행 21:38-39; 22:29).아마도 바울은 가족의 내력을 통해 처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 그는 또 다른 시민권을 얻게 된다. 바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밝힌 시민권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요 18:36).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 그 가족으로 입양될 때,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 새로운 왕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곧 “흑암의 권세에서 [중략]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된다(골 1:13).이중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법이처럼 우리에게는 이중 시민권이 있는데, 그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래의 네 가지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1. 하나님이 범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이 세상을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시더라도 그 통치를 인정해야 한다.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셨다(마 28:18). 그런데 이 세상은 여전히 타락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시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정이나 국가를 비롯한 창조 세계의 제도를 포함하여) 세상의 일시적인 질서를 다스리신다. 예를 들어 세상의 정부를 통해서는 공권력과 법적 구속력을 사용하여 질서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면, 교회를 통해서는 복음의 선포와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변화시키신다. 즉 성령의 권능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는 것이다.2. 지상의 시민권이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그 시민권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일시적인 것들도 중요한 변화를 일으켜 낼 수 있다. 가령 바울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거론하며 당국자들에게 호소하는 일보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이 땅의 권리를 중요한 일을 위해 사용했다. 그 결과 그의 시민권은 생사에 영향을 미칠 만큼 큰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물론 누군가의 일시적 필요를 해결하는 일보다 그의 영혼이 구원받도록 전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게 하는 일이 잠시 지나가는 현세에서의 고통을 줄이는 일보다 우선적인 사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은 복음 전도와 시민으로서의 역할 사이에 양자택일을 하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도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를 제자의 삶으로 부르셨는데, 그 제자도란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그분이 분부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며 그분을 따라가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마 28:19-20).3. 하나님이 일반 은혜 가운데 허락하신 정부를 포함하여 그분이 주시는 모든 선물을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세상 나라들이 분개하는 현실을 보며(시 2편), 절망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본래의 모습대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국가라는 제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위해 지상의 통치자를 세우셨다(롬 13:1-4).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악하든 그 직분에 있는 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롬 13:7). 이런 차원에서 정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악한 일은 억제하고 선한 일은 도모하고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이 정부이다(롬 13:2-4). 그러므로 우리는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는 정부가 올바른 기능을 하여 우리가 고요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딤전 2:2).4. 우리가 지닌 하늘의 시민권을 공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지상에서 사용하시는 수단에 참여해야 한다.이 세상은 우리가 소유한 하늘의 시민권을 볼 수 없다. 이 시민권은 지상의 정부가 인식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우리의 시민권이 공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방식을 정하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즉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그분의 백성이 함께 모여 구성한 예배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제도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즉 하늘의 시민들로 하여금 지상의 교회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원하신 왕의 성품을 반영하며 그분을 예배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예배하도록 초대한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며 하나님 나라의 최전방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가 맡은 공적 역할을 수행한다.분명 우리의 인생에는 정치 체제라든가 시민 활동보다 중요한 일들이 더 많음에도, 때로는 그와 같은 활동에 과도히 헌신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수준 이상으로 삶의 정체성을 거기에 둠으로써 우상 숭배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상의 시민으로서 우리가 이행해야 할 의무나 참여를 소홀히 하며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도 않은 영적인 이유까지 들며 우리의 무관심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 양극단의 자세 가운데 우리가 어느 쪽으로 쉽게 기울어지든, 우리에게는 두 가지 시민권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무엇보다도 복음에 의해 빚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차 다가올 나라를 기다리며 그 나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가운데서도,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며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의 공적 유익을 위해 열심히 수고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Living as Dual Citizens번역: 장성우
영성
신앙인
이중국적
어거스틴
하나님의도성
인간의도성
아브라함
거류민
나그네
하나님이 당신에게 힘을 주신다
by David Mathis
2019-10-23
당신은 에너지를 ‘관리’하는가? 점점 더 많은 전문가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관리하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에너지 관리를 주장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토니 슈워츠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과 증가하는 복잡성 사이에 더 많은 정보와 요구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와 달리 인간은 장기간 고속으로 계속 작동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높은 주파수와 낮은 주파수 사이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우리의 심장은 다양한 간격으로 뛴다. 우리의 폐는 수요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한다. 숨을 잘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숨을 깊이 내쉴수록 더 차분해지고 더 유능하게 된다(Tony Schwartz, Manage Your Day-to-Day).슈워츠가 말하는 종교적 책임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디자인되었다’라는 것을 인정한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디자인’되었다. 인간은 무한한 창조주에 의해 경이롭게 만들어진 유한의 창조물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찾아내는 것을 수반한다. 그러나 슈워츠는 계속해서 “하지만 우리는 점진적으로 하루 종일 에너지 저장소를 태워 버리는 전형적인 삶을 산다. 이는 은행 계좌에서 예치금 없이 자금을 인출하는 것과 동일하다. 어느 순간 파산하게 된다.”라고 말한다.초자연적인 일슈워츠의 관찰은 통찰력이 있지만, 그의 해결책은 일천하다. 그리고 ‘우리가 디자인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나의 창조주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우리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에너지를 관리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능숙하게 함으로써, 당신은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은 것을 더 높은 수준의 퀄리티로, 또한 더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서의 더 나은 에너지 관리에 대해 배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영향력, 경영, 큰 생산성보다 훨씬 더 나은 깊고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다.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닫힌 시스템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에너지 상승과 하강을 전적으로 자연적 힘의 산물이나, 원인과 결과, 휴식과 회복, 영양과 운동의 산물로 여긴 채 체념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적인 요소들은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손상, 심지어 위험으로까지 최소화하고 무시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초자연주의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닫힌 시스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평범한 과정에 개입하실 수 있으며 종종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매 순간 능력의 말씀으로 우주를 유지시키신다(히 1:3; 골 1:17). 또한 그분 자신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유지시키고 다시 채우신다. 이는 실제로 바울의 편지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격렬한 직업 윤리골로새서 첫 장의 마지막 부분은 내가 가장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바울이 사도로서 행한 사역의 중심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구절이다. 이 내용은 사도직과 구별 없이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 특히 목사 및 장로들과 공유되어야 한다.“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바울은 철저한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성경에서 어느 누구도 사도 바울보다 일에 대해, 특히 열심히 일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특이한 배선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독신으로서의 삶이 엄청난 사역들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보다 “수고를 넘치도록 했다고”(고후 11:23)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며, “나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라고 말했다(고전 15:10).그러나 계속해서, 바울은 그의 흔하지 않은 에너지와 노력을 존경할 만한 예외의 것이 아니라 따라야 할 본보기로 내세운다. 그는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능력 안에서 생산적인 노동을 위해 모든 크리스천은 성장할 수 있고 또한 스스로의 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공급하시는 그리스도바울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이 지닌 놀라운 에너지의 ‘비밀’과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공유했다(빌 4:12).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그는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며 ‘어떻게’를 설명한다. 그분은 ‘주님’이시며 10절에서 나오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데, 일부 번역은 이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그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예수님을 힘의 공급자로 여김을 확신할 수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이와 유사하게, 에베소서 6장 10절은 신이시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공급된 인간의 힘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을 ‘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침내, 디모데후서 2장 1절에서 영적 능력과 원천이신 예수님 사이에서 동일한 연결성을 정리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건하여지고.”바울은 이뿐만 아니라 무한히 소중한 신적인 힘으로 강건하기를 주장한다.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는 신적-인간의 능력을 증언하고, 예수님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그의 안에서 일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행해졌음을 증언한다.그분의 힘으로하나님이 우리를 크리스천으로서 강건하게 하실 때,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해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실 뿐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혜로 닫힌 시스템의 믿을 수 없는 개념을 산산조각 내실 때, 그분은 특별히 우리의 형제와 동료 인간,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우주의 주권자로서 권능의 보좌에 앉으신 왕의 왕, 주의 주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인간이다. 인류는 하늘의 보좌에 앉았다.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한계와 창조된 세상의 유한성의 한계에 맞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그분은 제한된 능력과 시간을 가진다는 것, 끝나지 않는 일들로 하루를 끝마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그분은 육체적으로 지치고(요 4:6) 휴식이 필요한 것과 휴식을 위해 시간을 따로 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막 6:31). 그분은 완성하라고 주신 일을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요 4:34; 5:36; 17:4). 심지어 안식일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눅 13:14-17; 요 5:16-17; 막 2:27-28) 그분은 쉬지 않고 일하시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계셨다. 그분의 사역을 통해, 인간 에너지의 생산을 통해, 그는 아버지의 증인이자 그가 누구였는지 증명할 뿐 아니라(요 5:36-; 9:3-5) 그분 자신이 공급자이자 우리 믿음의 중심임을 보여 주셨다(요 10:37-38; 14:10-11).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의 형제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동료 ‘일꾼’(마 9:37-38; 눅 10:7)으로 부르셨고,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가 가진 에너지로 일할 것을 명령하신다(마 5:16). 그러나 그분은 또한 우리 자신의 에너지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 모을 수 있는 활력, 단지 지혜로우며 중요한 에너지 관리를 통해서 생산할 수 있는 것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부르신 일에 대한 그분 자신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바울은 강력하게 일하신다고 강조하기도 한다.그분께 에너지를 요청하라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에너지를 식이요법, 운동, 그리고 휴식을 통해 돌보라고 배운 것을 잘 실천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음식과 잠이라는 선물들을 가볍게 다루면서 자연적인 방법 외에 우리에게 힘을 줄 다른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이는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제안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가? 하나님이자 인간인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강력한 에너지로 일하실 것이다.우리는 이것을 삶의 규칙적인 리듬으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신실하게 청지기의 역할을 하며,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에너지의 한계를 깨닫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께 그분의 에너지로 우리를 정기적으로 채워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지친 독립 의식을 내려놓고 그분이 공급하는 힘으로 열심히 일할 수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Will Give You the Energy: Working Hard in Another’s Strength번역: 송유희
생활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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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
공급자
한계
직업윤리
그리스도
청지기
온유와 존중으로 신앙을 변론하자
by Jared S. Oliphint
2019-10-21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믿을 수 있거나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지식과 다양한 진리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기독교가 더 포괄적인 종교였다면 크리스천의 삶은 훨씬 더 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객관적인 진리들이 거기에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자유롭게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그냥 자연의 주기적 패턴에 의해 점진적으로 진화된 하나의 생물학적 종이 아닌가? 상처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왜 성별 문제를 사회적 산물로서 유동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식당 메뉴에서 음식을 고르듯이 성 정체성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중요한 사항으로 대두될 경우, 보통 갈등이 발생한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그 문제가 중요하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바로 지키려면 주변 문화 및 그 가치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객관적 진리,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인류의 특별한 신분, 그리고 결혼과 가족의 핵심 역할 등과 같은 문제를 중요한 사안으로 본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사안이면, 우리에게도 중요하다.역사를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변 문화와 사상들에 반하여 살게 하셨다. 크리스천들은 자연 과학, 예술과 예능, 사회학, 심리학, 철학 등의 모든 학문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왔다. 이러한 학문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사람 중에는 때로 기독교에 대항하는 복잡하고 구체적인 논쟁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 왔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 우리 편에 계시며, 그분은 우리가 지적으로 어두워지지 않도록 말씀해 주신다. 그분의 자녀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주시는 분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인식론적 지식 또한 제공하신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전지전능하고, 주권적이며, 선하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쓰여졌음을 종종 잊어버린다. 성경 말씀이 기록되고 선별될 때 어느 것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채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모든 단어가 쓰여질 때 그분은 거기에 계셨으며, 우리가 지금 읽는 성경 말씀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도 신성하게 지휘하고 흠이 없도록 안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역사를 전능하게 통치하시며, 그 말씀이 완성된 후에는 그분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다. 기독교가 공격을 받으면, 그 공격이 개인에 대한 것이든지 혹은 기독교 전체에 대한 것이든지, 성경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증거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우주의 기원이라고 한다. 인간은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그 사실은 인간이 모든 다른 피조물로부터 구별됨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여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방대한 피조 세계와 그 세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대해서도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신다.그러므로 교회 밖의 사람들(혹은 심지어 내부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그 기원과 인간의 지위와 역할, 옳고 그른 것 등에 대해 기독교 신앙과 상반된 신념을 따르면 놀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에서 말씀하신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3:15–16).베드로는 이 본문에서 기독교 신앙이 주변 문화와 갈등을 빚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언제 방어를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가? 항상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온유와 존중으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방어한다. 우리와 그분이 모욕을 당하면 그러한 우리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 된다. 베드로가 원리를 제공했다면 바울은 이를 실행에 옮겼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양쪽 모두에서 기독교 신앙을 신학적으로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자신의 믿음을 방어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성경 말씀으로 그들과 논쟁했다. 베뢰아에서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사실인지 보려고 성경 말씀을 점검한 사람들은 베뢰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덴에서는 바울이 방어하는 모습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과 변론할 때,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을 전함으로 방어했다(행 17:18).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을 당혹하게 하려고 할 때 이 주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문화와 신앙에 대해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그들이 신을 믿고 있지만 그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변증한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은 아담과 그 자손들을 모두 창조하셨고, 모든 이들을 구원한 그리스도가 심판의 날에 다시 오기 전에 회개하라 하셨다고(행 17:30) 역설했다. 바울의 방법은 창조와 타락, 구속과 완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과 변론했다. 그는 아덴의 철학과 예술에 익숙했다. 바울은 상대방의 문화와 신앙을 잘 알고 존중하면서도 기독교의 본질을 타협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균형 있는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삶은 지적으로 쉬운 삶이 아니며, 또한 아니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학문 분야가 끊임없이 도전하는 공격으로 교회를 에워싸려는 것을 보아 오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도전을 주권적으로 통제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러한 도전에 답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주셨다. 지적인 거물들과 변론할 때, 우리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겠지만, 전지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은 우리 신앙을 항상 강하게 지켜줄 것이다. 상대방과 그 문화를 가능한 한 많이 아는 것은 설득력 있는 전술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를 방어하는 모든 내용은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온유와 존중으로 제대로 방어하면, 도전하는 사람과 도전을 받는 사람 모두를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Defending the Faith번역: 정은심
영성
신안과소명
온유
존중
신앙
변론
베드로
바울
크리스천
시작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by R. Carlton Wynne
2019-09-23
해마다 여름이면, 부모님은 우리들을 자가용에 태우고 여름 방학 연례행사인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떠나셨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부모님이 방학 여행 중에 느끼셨을 것을 나도 아버지로서 경험하고 있다. 예전에 아버지가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내려가실 때 그분의 귀에 울렸을 똑같은 질문을 나도 이제 내 아이들로부터 종종 듣는다. “아직 다 안 왔어요?” 물론, 대답은 물음 속에 있다. 그래도 아내와 나는 앞 좌석에 앉아서 대답해 준다. “아니, 아직 다 오지 않았어. 도착하면 알려 줄게.” 가족의 장거리 자동차 여행 중에 자녀들이 반복해서 묻는 질문과는 달리,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성경이 그리고 있는 명확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에 관하여 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성경은 크리스천의 삶을 반드시 끝까지 달려야 하는 경주로(고전 9:24; 딤후 4:7 참조), 또한 “장차 올” “도성”을 향하여 가야 하는 순례 여행(히 13:14)으로 비유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고]”(마 16:24; 막 8:34),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행[하며],”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도록]”(빌 3:14) 부름받았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오늘날 크리스천의 삶이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어려운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여전히 그 여정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온갖 형태의 시련과 죄악된 성향에 직면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는 육체적인 퇴락과 도덕적인 퇴락 모두를 경험한다. 해가 가면서 우리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간다. 만약 이러한 냉혹한 현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현실은 우리에게 “아니야, 아직은 더 가야 해. 목적지에 다다르면 알게 될 거야”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신비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성경은 크리스천의 삶을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그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천국의 초자연적인 힘이 타락한 세상에 들어왔다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기 시작하면서, “천국이 가까왔다”(마 4:17)고 전한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냄으로 천국이 도래한다고 명백하게 언급하신다(마 12:28; 눅 9:11).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눅 2:38) 연로한 성도들은, 예수님이 선언하셨듯이, 그분의 오심은 곧 구약의 선지자들이 수천 년 동안 기다려 온 것의 성취라는 사실을 알았다(눅 4:21; 24:25–27). 그리스도가 행하신 치유와 귀신 쫒는 사역은 결정적으로 그분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심으로써 최고조에 이른다(요 12:31–33; 히 2:14–15). 지금도,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가르치며 누구라도 믿음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다(눅 16:16; 18:17 참조)고 가르친다. 이것이 히브리서 저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을 “내세의 능력을 맛[본]”(히 6:5)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는 이유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구원을 살펴보면, 크리스천들은 목적지에 이미 도달했다. 동시에, 성경은 천국이 아직 ‘완전하게 그리고 마침내’ 도래하지는 않았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구속 목적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미래에 남아 있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 즉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다(살전 1:10). 이런 이유로, 믿는 자들은 세상에서의 여정 동안 예기치 못한 장애물과 적군을 맞이하더라도, 무엇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여야 하며(마 6:33),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계속 기도해야 한다(10절). 요약하면, 약속된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이 땅에 궁극적으로 계시될 그 왕국을 기다려야 한다. 자동차 안에서 “아직 오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단순히 대답한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궁극적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질문에 성경이 말하는 현실은 좀 더 미묘하다.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는, 실제로 그 대답은 “예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즉시 연합되며, 그분 안에서 미래를 향한 목적지로의 접근을 즐긴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가 기뻐하며 모여 있는 곳에 오게 된다고 말한다(히 12:22). 이와 유사하게, 바울도 크리스천들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게 된다고 말한다(엡 2:6). 그렇지만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노!”이다. 우리는 아직 기다리고 있고, 찾고 있으며,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으나 아직 눈으로 보지는 못하고 있다(고후 5:7 참조).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 목적지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좀 더 정확한 대답은 “예스 그리고 노!”이다. 즉, 이러한 모순적인 대답은 통합적이고도 영광스러운 진리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들은 믿음으로 이미 그리스도께 나아왔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무한한 열정으로 미래를 향해 경주할 수 있고, 또한 그리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때문이다(빌 3:20).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여, 어떤 장애물이 앞에 놓여 있더라도,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 앞에 놓인 길을 인내로 달려가라(히 12:1). 또한 “말세를 만난”(고전 10:11)사람들처럼 그 경주를 하라.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말세”를 가져다 줄 것이며, 그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곧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히 9:28).출처: www.ligornier.org원제: Are We There Yet?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크리스천의삶
목적지
아직
천국
구속
하나님의왕국
그리스도
우리 믿음에 공로가 있는가?
by John Piper
2019-08-26
이 글에서 내가 답변하려는 질문은 이것이다. “믿음이 구원받는 일에 필수 조건이 된다면(엡 2:8; 행 16:31; 롬 5:1), 구원을 받게 하는 공로가 믿음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나는 이런 질문이 만인구원론자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부터 지적하고자 한다. 만인구원론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모든 사람이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아 결국에는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로서 이 믿음은 말 그대로 만인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여겨질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관점에서는 믿음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러한 만인구원론의 전제가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롬 5:1)다고 가르치는 성경의 전제, 즉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구원을 얻지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도 못한다는 바로 그 전제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자세란 마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렇듯이 우리 각자의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분명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믿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에 필수적이라면, 과연 구원을 얻는 데 있어 믿음에 어떤 공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기서 언급되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질문에서 등장하는 핵심 용어는 ‘공로’와 ‘믿음’이다. 일반적인 용례를 따른다면, 공로란 누군가로부터 마땅히 무엇인가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결과를 말하는데, 이는 그 행위나 자질이 충분한 가치를 지녀 타인으로 하여금 그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경우에 쓰이는 개념이다.첫 번째 예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그렇다면 믿음에는 어떤 요소가 수반되며 그 믿음이 과연 구원에 기여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두 예화를 나눠 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한 살인자의 이야기인데, 여기서 이 사람을 바로 당신이라고 가정해 보도록 하자. 지금 당신은 모든 사람이 당신의 유죄를 알고 있을 만큼 죽어 마땅한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런데 대통령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 편지에서 대통령은 말하기를, 자신의 최고 권력으로 당신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면제하고 석방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당신의 무죄를 입증할 만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자비를 선포할 수 있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국법을 어긴 당신의 태도가 그의 자비로운 통치권 앞에 겸손히 낮아져 결국에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는 편지에 찍힌 자신의 인장을 교도소장에게 보여 주기만 하면, 아무 이의 없이 자유롭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고 알려 준다.이 지시에 따라 당신은 간수를 불러 편지를 보여 주며 교도소장과의 만남을 허락받는다. 그렇게 해서 교도소장의 사무실로 들어선 당신은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불어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생기와 자유로 가득한 느낌이다. 그 창가 너머에는 푸른 나무와 그 위로 날아다니는 새가 보인다. 이제 손에 붙들고 있던 편지를 교도소장에게 건네니, 그가 그 내용을 읽고는 아무 질문도 없이 간수를 불러 당신의 옷과 물건을 내주라고 명한다. 그렇게 해서 교도소를 나오게 된 당신은 고개를 돌려 그 거대한 건물을 한번 돌아본다. 작은 창틀이 빼곡히 나열된 회색 건물, 불과 조금 전까지 당신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된 당신은 이제 앞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껑충 뛰어오르며 크게 한번 소리쳐 본다. 마침내는 웃음을 참지 못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외친다. “대통령이 나를 석방시켰다! 대통령이 나를 석방시켰다!”두 번째 예화: 가난한 노동자두 번째 예화에서 당신은 가난하고 실력이 부족한 노동자이며 할 수 있는 일을 다해봤자 처자식을 겨우 먹여 살리는 처지에 있다. 그러던 중 어느 저명하고 부유한 자선 사업가가 보낸 편지 한 통을 우체통에서 발견한다. 내용인즉, 어떤 변호사에게 이 편지를 가져다주면 아무 조건 없이 수억 원의 돈을 지급해 준다는 것이다. 그 자선가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저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런데 그가 왜 유독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신은 그저 편지를 들고 가서 돈을 받아오는 일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지시대로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간다. 그리고 편지를 건네주자 변호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현장에서 거액의 수표를 꺼내 주며 당신에게 행복하게 지내라고 인사한다.이 두 이야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각각의 상황에서 당신은 자유라든가 재물을 요구할 만한 공로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한 가지 조건은 충족시켜야 했다. 곧 자유나 재물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대통령이나 자선가에게서 받은 편지를 가져가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편지를 보여 주는 행동이 너무 값진 일이어서 대통령이나 자선가가 당신에게 ‘보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앞서 정의했던 공로의 개념을 각각의 경우에 적용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여기서 믿음이 무엇인지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나 가난한 노동자의 반응을 통해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어떤 근거에서 죄수와 노동자가 자유나 재물을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지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것들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에서 사용하는 그 어떤 ‘공로’의 개념도 “저는 이 편지를 들고 왔으므로 마땅히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다시 말해 어떤 경우에도 “이 편지를 당신에게 가져온 행동은 대통령이 보시기에 공로가 지대해서 저를 석방시켜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이는 죄수가 경험한 그 놀라운 상황을 완전히 왜곡시키는 말이 될 뿐이다.그 상황에서 죄수는 오직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대통령께서 자비롭게도 사면의 은혜를 저에게 베푸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 약속을 지키시리라고 믿습니다. 저의 유죄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한 말을 분명 지키실 것입니다.”인간의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즉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요청하면서 믿음의 주체(즉 인간)인 당사자에게는 영광을 돌릴 수 없도록 하는 독특한 행위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그분으로 하여금 신자를 구원하도록 요청하는데, 이는 믿음 자체에 있는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믿음이 하나님의 공로와 명예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그분의 확고한 의지를 주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믿음을 요구하는 성경의 목적시편 전체에 걸쳐 우리는 여러 가지 믿음의 탄식을 들을 수 있다.“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시 143:11).“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시 25:11).“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시 109:21).바울은 믿음의 본질이 인간의 공로와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밝혔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이어서 그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 당신에게 도착한 대통령 또는 자선가의 편지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이 약속을 믿음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뿐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Is Faith Meritorious?번역: 장성우
영성
신앙과소명
믿음
공로
성경의목적
구원
그리스도
바울
아브라함
의심을 떨쳐버리려면
by Matthias Lohmann
2019-08-05
“나의 믿음 약할 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다. “나의 믿음 약할 때, 주가 붙드네”라는 가사가 언제나 큰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을 크게 흔드는 인생의 풍파 앞에서,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가 나를 붙드신다는 그 확신을 잃어버린다.많은 크리스천들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의심 때문에 힘든 싸움을 벌인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은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선언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다]”(34절). 또한 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절)라고 선포함으로써, 처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나타나기도 했다.이러한 선언 이후,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27-30).이처럼 세례 요한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의심을 품은 시기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소망대로 삶이 흐르지 않던 때였다. 나사렛에서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중략]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18-21).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적어도 그 예언의 일부는 자신에게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헤롯궁전에 갇혀 있는 동안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라는 말씀이 언제 실현될지를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이처럼 소망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고통스러운 간극을 느낀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크리스천은 새롭고 더 나은 삶을 소망하는 기쁨 속에서 그분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의 여정 속에서, 한때 매우 가깝고 깊던 주님과의 관계가 새삼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나를 붙잡아 달라고 주님의 이름을 아무리 외쳐 보아도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예를 들어 보자. 당신은 성적으로 순결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며, 그분이 알맞은 배우자를 보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들은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당신은 가족을 꾸리고 싶은 열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홀로 남아 있다. 이처럼 주님이 당신의 인내와 순종에 아무 보상도 주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또 다른 예로 당신은 주님을 섬기듯이 타인을 섬기는 온유한 크리스천이며, 직장에서는 맡겨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는 부지런한 직원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가족과 교회를 섬기는 일로 인해 당신은 점점 더 피곤함을 느낀다. 주님께 큰 힘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정반대의 현실이 이어지고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당신이 정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고갈되고 있음은 물론이다.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많은 크리스천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과연 그분은 내 기도를 들으실까? 주님은 나를 돌보시는 않는 것 같은데, 내가 진정 그분의 자녀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도 이러한 의심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름을 느꼈을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는 의심하는 것을 마치 멋진 행위처럼 여긴다. 다시 말해, 현대 문화에서는 의심이 매우 이성적이고 성숙한 사고로 인식된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의심이 증가하는 만큼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에도 힘쓰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의심이 들 때, 노력 없이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요한으로부터 바로 이러한 차이를 배워야 한다.그는 감옥 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에 관하여 모두 듣고 있었고, 마음속의 의심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 두 명의 제자를 예수님께 보냈는데, 이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가르쳤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20)라고 물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그들을 못 본 체하시는 듯 보였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21절). 하지만 이는 그분이 주신 일종의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곧이어 그들에게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22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메시아를 예언하는 구약성경의 몇 구절을 가리키며 자신이 그 예언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포로된 자들의 자유함과 모든 사악한 것에 대한 심판의 때가 왜 아직 임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시지 않았다. 또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품었을 법한 질문에 대해 모두 답하시지도 않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분은 요한에게 그가 아는 모든 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이를 통해 그의 의심을 극복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의심이 생기기 시작할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확실한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 없이 그저 의심만 하지 말라. 대신 의심을 잠재우고 확신을 얻게 하는 증거를 찾아보라. 다시 말해, 확실한 것을 찾으라. 의심이 계속 증폭되도록 놔두는 것은 마치 자라나는 잡초를 그냥 두는 것과 같다. 잡초는 작은 잎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뽑아내지 않으면 정원 전체를 차지하는 성향이 있다. 의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희미하게 시작된 의심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그 희미함이 결국 당신의 영혼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 확실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에 덧붙여,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은 가능하면 반복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당신이 확실하게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분의 사역을 먼저 보게 한 후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로 하여금 의심을 떨쳐내도록 이끈 것은 물론이다. 이렇듯 그분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우리의 메시아이다.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혹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기대에 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의 바람과 다른 응답이 결코 그분을 의심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의 기대치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분이 요한이나 다른 많은 사람들의 소망에 따르시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들의 기대에 응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명백하게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분이 진정한 메시아임을 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오직 그리스도가 행하신 희생으로 우리는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다. 오직 그분이 행하신 사역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오직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그분의 자녀인 우리들은 언젠가 영원한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모든 슬픔과 고통 그리고 눈물을 뒤로하고 말이다.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함으로써 말씀을 마치신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3).의심하는 자들이여, 예수님이 하신 이 약속을 믿기 바란다. 그분이 주신 영광스러운 진리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의심을 풀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 당신에게 확실한 진리를 가르치고 이를 기억하도록 인도할 교회를 찾아보라. 교회는 찬송과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진실로 그분의 모든 자녀를 붙잡으신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줄 것이다.맷 머커(Matt Merker)가 작사한 “나의 믿음 약할 때”의 세 번째 가사를 들어 보라(가사 원본-역주). “피를 흘려 죽기까지 주가 나를 붙드시네나의 죄를 지심으로 주가 붙드네주가 오실 때에 우리 확신할 때까지영원 생명 주심으로 나를 붙드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Way Out of Doubt번역: 정은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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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세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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